[예술] 감정미술관 19-②. 콩은 왜 태양이 되지 못하는가?
| [감정과학 예술 칼럼] 감정미술관 19-②. 콩은 왜 태양이 되지 못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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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빈아
• 문화교차연구소 연구위원
• 감정과학 예술 연구원
바로 이어 갑니다. 앞의 글에서 선택으로 이미 있던 진리(理)를 발견하는 것까지, 저의 생각의 사유를 확장했었습니다.
지금은 ‘콩은 왜 태양이 되지 못하는가’의 시작이 되었던 <선택 공리>의 가장 중요한 설정인 무한을 이야기 해 보려 합니다.
수학자들이 말하는 <선택 공리> 속의 무한은 수학적 무한입니다. 콩 안의 찍을 수 있는 무수한 점들, 그로 인해 끝없이 나뉘는 무한한 집합들, 그 집합들에서 선택되어야 하는 대표들도 모두 무한입니다.
그러나 저의 사유 안에서 무한은 단순히 끝없이 많다의 수학적 무한이 아닙니다. 저는 살아감에 있어서, 무한히 열린 가능성에서 이유 없이 아무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의 가능성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질서가 분명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필연입니다. 갑자기 필연이라니, 참 생뚱맞죠?
처음에는 우연히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이 쌓인 어느 시점에서 ‘아, 이것 이어야 했구나.’ ‘그럴 이유가 있었구나.’를 인지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그때의 선택들은 우연에서 필연으로 바뀝니다. 내가 고른 줄 알았던 것이 선택들이 진리(理)가 되어 필연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에게 예술적 발견은 이러한 순간들 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참으로 분명합니다.
수많은 색이 있고, 수많은 선이 있어요. 그리고 수많은 재료와 도상 또한 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그 중 하나를 제가 임의로 선택하는데, 저에게 재능이 있어서 작품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저를 우연에 의한 상황 적응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알았습니다. 이 색이어야만 했고, 이 선이어야만 했고, 이 재료여야만 했다는 것을. 그 당시 선택들은 단순한 우연의 조합이 아니었습니다. 나 스스로 알게도, 모르게도 했던 완전한 선택의 연속이었고, 그렇게 사물과 감정 속에 숨어 있던 진리가 형상으로 밝아지는 순간이, 나의 작품으로 형상화 되었더라구요.
참으로 많이 돌아 왔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콩은 왜 태양이 되지 못하는가’
저의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콩은 선택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학의 세계에서는 무한한 선택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현실의 콩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의 결론이기도, 수학자들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와 수학자가 분명히 다른 결론이 있습니다.
사실 콩은 태양이 되기 위해 선택할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콩은 콩으로 완전한데, 콩이 태양이 되고 싶어 하나요? 각각의 존재의 이유는 분명 있습니다.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동은 동대로
콩은 콩대로
태양은 태양대로
그냥 완벽합니다.
그 다름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 감히 누가 하는 걸까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필연적으로 완벽합니다.
저는 이것을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과 연결해 봅니다. 이때 천명을 잘 알아야 합니다. 바깥에 있는 하늘이 나에게 명령을 내렸기에 나는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존재는 밖에서 가치를 부여받아 완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필연성으로 이미 각자 고유한 성(性)으로 완전합니다. 그리고 그 성(性)은 결핍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주어진 완벽한 순수의 선(善)입니다. 곧 순수지선(純粹至善)입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콩이 태양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신이 그렇게 만들었기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도 아니고, 콩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체로 필연적으로 완벽하기에 콩은 태양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콩은 콩으로서 이미 자기의 진리(理)로 완벽하고, 태양은 태양으로서 자기의 진리(理)가 있습니다. 누가 더 크고, 더 빛나고, 더 가치 있는가가 아니라 각자의 존재가 자기 안에 있는 리(理)를 어떻게 드러내는 가에 있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에서 인간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한 걸음을 더 나갈 수 있습니다.
콩도 태양도 자기 안의 필연성을 묻지 않습니다. “나는 왜 콩인가”,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자연 안에 있는 필연성을 배우고, 느끼고, 알고,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이미 자기 안에 성(性)과 리(理)를 지니고 있기에, 그것을 통해 또 묻고, 느끼고, 선택하고, 다시 읽으며 자기 안의 리(理)를 스스로 발견합니다. 맹자가 말한 것처럼 마음을 다하면 성(性)을 알고 자기의 성(性)을 알면 천(天)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정과 인지를 통해 자기 안의 리(理)를 발견하는 일로, 이것이 형상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예술이 됩니다.
이 점에서 제가 연구하는 민화가 순간 생각납니다. 민화는 단순히 예쁜 그림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과 사물 속에 깃든 필연성을 느끼고, 그것을 감각과 상징의 형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은 결핍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고, 더 큰 태양이 되기 위한 경쟁도 아닌 것입니다.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내 안에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나아가게 하는 건지 읽어 내야 합니다. 선택은 나를 다른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발견하게 합니다.
이것이 내가 콩도 태양도 아닌 이유입니다.
나는 다릅니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다시 읽습니다. 그 안에서 바랄 만 한 것을 알아보고, 그것이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하며, 마침내 진리(理)를 발견합니다. 이때 무한은 단순히 끝없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필연으로 밝아지는 영원무한의 감각이 됩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필연이 이것입니다. 세계는 우연히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필연의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질서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선택 속에서 그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예술은 바로 그 발견이 형상이 되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지금의 현실과 또 합쳐지네요.
AI는 선택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을 통해 리(理)를 발견합니다. AI는 무수한 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 가능성 속에서 “이것이어야 했다”는 필연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예술은 무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예술은 이미 세계 안에 있던 리(理)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각의 형상으로 밝히는 일입니다.
선택은 예술 안에서 발견이 되고, 발견은 다시 필연의 형상이 됩니다.
콩은 태양이 되지 못합니다. 사실 콩은 태양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태양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콩을 바라보다가 태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서 자기 안의 리(理)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