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감정미술관 19-①. 콩은 왜 태양이 되지 못하는가?
| [감정과학 예술 칼럼] 감정미술관 19-①. 콩은 왜 태양이 되지 못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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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빈아
• 문화교차연구소 연구위원
• 감정과학 예술 연구원
어느 날 TV를 돌리다. 멈췄습니다. “콩으로 태양을 만들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강의인가 했는데, 수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처음 본 이 문장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콩으로 태양을 만들 수 있다.”
강사가 말합니다. 콩만 한 작은 것 안에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점을 찍을 수 있고, 그 다양한 점들의 집단에서 하나씩 대표를 선택하여 대표 집단을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선택이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면, 작은 콩도 태양만 한 크기의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기입니다. 참 개똥 수학이구나 했습니다.
콩은 콩이고, 태양은 태양인데 작은 것이 어떻게 거대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이 강의에 빠져들었고, 채널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간단히 수학을 이야기할게요. 원치 않으시면 이 한 단락은 건너 뛰셔도 됩니다.
이 강의는 수학의 <선택 공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더라고요.
<선택 공리>는 비어 있지 않은 여러 집합들이 있을 때, 그 각각의 집합에서 하나씩 원소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는 수학의 원리입니다. 특히 그러한 집합들이 무한히 많고, 명확한 선택 규칙이 없을 때에도 “그러한 선택 함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매우 강력한 공리입니다.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은 이 선택 공리와 관련된 매우 유명한 결과로, 하나의 공을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누고, 다시 배열하면 원래 공과 같은 크기의 공 두 개를 만들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이것은 현실의 물질을 실제로 자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조각들은 가위나 칼로 자를 수 있는 조각이 아니라, 일반 부피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이론상의 점들의 집합입니다. 그래서 이 역설은 물리적 현실 이야기가 아니라, 선택 공리와 비가측 집합이 만들어내는 수학적 세계안의 이야기입니다.
이후 저의 머릿속은 수학으로 넘실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수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넘실되며 생각하다 보니 알았습니다.
이 수학 이야기는 콩과 태양의 크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요.
이후, 하나의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콩은 왜 아직 콩이지?’
수학적으로는 콩이 태양이 될 수 있다는데, 현실의 콩은 왜 언제나 콩이고, 콩이 태양이 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오늘 저의 사유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콩이 태양이 될 수 있는 가설, 그 안에는 ‘선택’이 있습니다. 콩 안의 무수한 점들의 집단에서 하나씩 대표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은 콩도 나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콩은 아직 콩입니다.
그런데 이 수학 문제가 나의 문제로 전환되네요. 콩은 선택하지 못해 태양이 되지 못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건데, 그럼 내가 태양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저의 사유는 칼럼의 마지막에 언급 됩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 ‘선택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분명 결과가 다르니까요. 그리고 나는 선택합니다. 그럼 다시 선택하는 것 만을 생각하면, 나의 선택들은 단순히 여러 가능성 가운데 임의로 하나를 고르는 일 이었을까요?
수학의 <선택 공리>는 '선택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그 가능성이 아닙니다. 삶으로 무한하게 존재합니다.
저는 아무것이나 고르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찰라, 어떨 때는 인지하지도 못하는 순간이지만 저는 선택하면서, 알게 모르게 계속 묻습니다.
‘왜 나에게 오지?’
‘왜 나는 이것을 가지고 싶지?’
‘왜 이 선택은 계속 내 안에 여운으로 남지?’
등등.
이 점에서 잠시 지금의 시대와도 연결 해봅니다.
나의 선택과 AI의 선택과 무엇이 다를까요? 사실 AI도 선택처럼 보이는 일을 무한히 하고 있잖아요. 무수한 데이터를 처리하고, 가능한 답들을 비교하고, 조건에 맞는 결과를 선택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산출입니다. 산출이라고 말하는 분명한 이유는, AI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다시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자신에게 남았는지, 그것이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는지, 그것이 자기 존재를 어떻게 밝히는지 스스로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저는 선택한 뒤에 다시 돌아봅니다. 다시 느끼고, 생각하고, 내 안에서 계속 확인합니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 그냥 고른 줄 알았던 선택이, 얼마나 중요했던 것 인지를 알게 됩니다. 또한 어떤 선택은 금세 사라지고, 어떤 선택은 오래 남습니다. 그러한 선택을 통해 몰랐던 진리(理)를 인지합니다. 그래서 선택은 한 순간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되고 나를 밝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택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진리의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앗, 여기서 옛 언어와 연결됩니다. 『중용』에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선을 택하여 굳게 붙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의지로 버틴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이 문장을 ‘나의 앞에 드러난 선을 알아보고, 그 밝음을 놓치지 않는 선택’으로 읽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학의 <선택 공리>가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음”으로 끝이지만, 나의 <선택>은 택선고집(擇善固執)으로 “무엇이 선한가를 알아보고 선택함”이 됩니다.
우리는 가능성들 사이에서 의미 없이 하나를 집어 드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수한 가능성들 속에서 나에게 참인 것과, 나의 욕망을 정확히 아는 존재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무작위가 아니라 택선(擇善)입니다.
또 다른 옛 언어가 있습니다.『맹자』에는 “가욕지위선(可欲之謂善)” “유저기위신(有諸己之謂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랄 만한 것을 선(善)이라 한다’ ‘그것이 자기 안에 있음을 신(信)이라 한다’는 뜻입니다.
갑자기 선·착함(善)과 신·믿음(信)이 나와 당황하셨나요? 저도 이런 제가 당황스럽네요.
여기서 말하는 선(善)은 남들이 규정하는 ‘착해라’의 명령이 아닙니다. 선(善)은 내가 자기 안에서 “이것은 참으로 바랄 만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信)은 그것이 ‘내 안에 실제로 있음을 믿어라’ 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의 확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더욱 귀합니다. 처음에는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마구 고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참으로 바랄 만한 것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자기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면, 이 모든 선택은 단순한 취향이나 판단을 넘어섭니다. 그때 선택은 진리(理)의 발견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理)는 선택 이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理)는 이미 사물과 세계, 감정과 경험 속에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 느끼고, 알아차리고,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내가 압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택은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택으로 이미 있던 진리(理)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생각 보다 글이 길어지네요. 콩이 왜 태양이 되지 못하는지에 대한 나머지 사유는 다음 편에서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