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감정사랑방 2. 페르소나
[감정과학 코칭 칼럼] 페르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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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저는 오늘도 하나의 페르소나를 벗는 중입니다.
7월생인 큰딸이 학교 가는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아빠는 구청 직원분께 담배 한 보루를 선물하며 제 나이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때부터 어쩌면 제 인생에 비교가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모르고 알고, 없고 있고, 존재의 비교부터 부모님의 학력, 재산 비교 등 초등학교 입학부터 졸업 내내 진행되었지요. 그 사이 제 감정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변화했지만 안 그런 척, 모르는 척 무시하기 바빴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가 틀리거나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달라도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이해는 안 되었지만 이해하는 척 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prosopon)에서 유래된 용어입니다. 가면에는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정체를 알려주는 역할의 표상이 담겨 있는데요. 현대 심리학에서는 구스타프 융(Gustav Jung)이 사회에 드러내는 자아의 모습을 페르소나라고 정의했어요. 이때 페르소나는 자기(Self)가 아닙니다. 개인과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형성된 개인의 사회적 얼굴입니다. 물론 이 가면을 내 것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죠. 페르소나 또한 나의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존재로서의 진짜 ‘나’가 빠져 있습니다.
[출처: Freepik]
그렇다면 존재로서의 진짜 ‘나’는 무엇일까요? 퇴계 선생은 『성학십도(聖學十圖)』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 “취기품중 지출본연지성(就氣稟中 指出本然之性) 기품(氣稟) 가운데 나아가 본래 타고난 선함을 가리켜 드러낸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기품은 한 개인의 기질과 품성으로 바로 ‘나’입니다. 기품을 떠나서는 ‘나’가 없습니다.
그런 ‘나’를 겉모습으로 비교하고 해석하거나 평가하게 되면 ‘나’를 이루는 귀한 기품이 왜곡됩니다. 왜곡된 기품은 왜곡된 ‘나’로 향하고, 그 결과 진짜 ‘나’를 잃게 됩니다. 이렇게 잘못 이해된 기품을 바로잡는 것이 리(理)입니다. 리(理)는 기품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아 자기 존재의 진실을 바로 보게 합니다. 결국 페르소나는 기품에 대한 인식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리(理)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리(理)는 무엇인가요?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서명도(西銘圖)에서는 “건칭부 곤칭모 여자막언 내혼연중처(亁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건(亁)을 아버지라 부르고 곤(坤)을 어머니라 부르니, 나는 이 작은 몸으로 건곤과 혼연일체로 완전히 하나가 되어 그 가운데 자리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버지 어머니는 나(予)의 생물학적 부모가 아닙니다. 성동권 교수는 퇴계 선생의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에서 “생물학적 부모는 잠시 보류하고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몸에 집중해 보면 우리가 부모(父母)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은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생각해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엄마아빠로부터 태어난 나(予)’라는 사실을 자명하게 알 수 있다”고 논합니다. 나아가 “건곤 부모(亁坤 父母)를 깨닫게 되면 내 몸은 천지를 가득 채운 몸이며, 내 본성은 천지를 다스리는 본성”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건곤의 자녀로 한 탯줄에서 태어나 더불어 사는 존재이며, 내 안에는 무극의 태극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천지만물을 하나로 관통하는 이치, 그것이 리일(理一)입니다.
그런 존재인 나를, 나 스스로 몰랐던 것입니다. 몰라서 불안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이 상태를 절망의 1형식으로 표현하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욕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이를 퇴계 선생은 『성학십도(聖學十圖)』 서명도(西銘圖)에서 ‘환(患)’이라 명명하며, 천지 부모 만물과 연결된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막연히 떠도는 걱정과 불안이라 하였습니다.
환(患)은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으니 타인의 것을 보며 부지런히 따라 해보고, 그러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이는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의 2형식으로 “자기가 타인에게 예속되어 있음”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나이기를 원하지 않고 타인과 같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상태가 퇴계선생이 서명도(西銘圖)에서 말한 병(病) 입니다.
저는 타인에게 “너무 대단하세요. 멋지세요. 훌륭하셔요.” 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제 눈에는 그들이 정말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면 제 스스로의 모습은 늘 미흡하고 부족하게만 느껴졌어요. 어쩌다 상대방이 “선생님도 너무 멋지세요.”라고 말하면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고 불편했습니다. 나 스스로 멋지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타인이 멋지다 할 때 민망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정과학을 배우고 나니 그때의 민망함이 비로소 보입니다. 스피노자(Spinoza)는 『에티카』에서 ‘인간 정신은 오직 신체가 받는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인간 신체 자체를 인식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 하였고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신체의 변용은 감정이며, 자기 자신은 정신(마음)으로 신체의 변용인 감정과 동시에 변용의 관념으로 존재하여 인식함으로, 결국 신체의 변용도 관념이고 관념도 감정으로 존재하기에 내가 매 순간 느끼는 감정을 신체적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출처: PNGTREE]
돌아보니 저는 매 순간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하며 살아왔습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힘든데 모르는 척.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힘든지 몰랐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내 시선이 늘 바깥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것이 더 좋아 따라하는 동안 정작 저는 제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내 안에 밝은 리(理)가 이미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으니 아팠던(病) 것입니다.
페르소나를 벗는다는 건 사회적 가면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감정에 귀 기울이고 감정에 머물며 완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페르소나 속에 갇혀 정작 자신이 얼마나 완전한 존재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매 순간 감정을 만나고 머물 때, 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나답게’ 기쁘게 살아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