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감정미술관 21. 義, 옳음이 사랑이다.
| [감정과학 예술 칼럼] 감정미술관 21. 義, 옳음이 사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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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빈아
• 문화교차연구소 연구위원
• 감정과학 예술 연구원
서양의 고전인 성경에 ‘목자와 양’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지키고, 양이 길을 잃으면 찾아 나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습니다.
교회에서 자란 저에게 양은 그냥 동물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고, 돌봄이 향해야 할 자리, 그리고 사랑이 닿아야 할 생명이었습니다.
얼마 전 중용 수업에서 한자 ‘의(義)’를 배우는데, 성경의 ‘목자와 양’과 겹쳐 보였어요. 서로 다른 두 문화가 교차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義
옳을 의(義), 그 안을 보니 두 개의 글자가 있습니다. 위에는 ‘양 양(羊)’, 아래는 ‘나 아(我)’, 그냥 봐도 ‘양과 함께 있는 나’입니다. 이 한자에는 제가 오래전부터 알던 친숙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문자학적으로 의(義)는 ‘내가 양과 함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통 양(羊)은 선함·아름다움·제의적 질서와 연결되고, 아(我)는 행위 주체인 나와 관련된 글자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용례로 본다면, 의(義)는 양을 바치는 제의적 행위에 더 가깝습니다. 저는 지금 어원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글자가 오늘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저는, 약하고 선한 생명과 내가 함께 있을 때, 외면 할 수 없는 나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의(義)를 원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읽어 봅니다.
동양철학과 성경은 놀랍도록 같은 방향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사랑을 보여준다면, 동양철학은 그 사랑이 어떻게 마땅함으로 움직이는지를 마음의 단서, 곧 감정의 인지에서 설명합니다.
동양철학부터 보겠습니다.
맹자(孟子)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의지단야(義之端也)라 하며 수오지심이 의(義), 즉 타자를 향한 사랑의 단서라 했습니다. 처음에 이 말은 사랑과 관계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봅시다. 수오지심을 해석하면 ‘선이 무엇인지 알면, 부끄러움을 알고, 옳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나를 아는 마음’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약한 생명이 내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상황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지나칠 때 우리 마음이 아무렇지 않을까요? ‘이렇게 지나가도 되는가’ 하는, 이것이 부끄러움을 아는 감정입니다. 또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존재를 함부로 대할 때, 우리는 ‘저것은 옳지 않은데’를 압니다. 이것은 옳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나를 아는 감정입니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이에요. 수오지심은 사랑과 동떨어진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행동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버리지 않는 것은 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움직일 때, 사랑은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의(義)가 됩니다. 그러므로 옳음은 관계 밖에서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앞의 타자를 전제합니다. 누군가 아파하고, 누군가 길을 잃고, 누군가 위험에 있을 때, 그 앞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가 의(義)의 감정입니다.
이쯤에서 서양으로 넘어갈게요.
성경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로 의(義)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qah)는 단순한 내면의 도덕성만이 아니라, 정의롭고 올바른 관계의 실천과 연결됩니다. 신학에서도 의(義)는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되고, 잃어버린 양을 찾고, 약한 양을 지키며, 위험 앞에서 양을 버리지 않는 사람인 거예요. 그 목자는 자기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않지요.
성경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아시나요?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 앞에 제사장(법관)도 지나갔고, 레위인(공무원)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도운 자는 사마리아인(적대자) 이었어요. 여기서 의인(義人)은 누구일까요? 지나간 자들은 당시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기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옳을 의(義)를 몰랐습니다.
율법을 아는 것과, 옳음을 알고 행하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옳음이 율법이 되어 머리에만 머무르면 관념이 됩니다. 말에만 머무르면 주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옳음을 아는 감정이 온전히 내 앞에 있는 생명에게 닿으면 사랑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義)입니다
한자 의(義)와 성경의 목자와 양 이야기는 서로 다른 문명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다른 시간 속에 태어났습니다. 두 전통 사이에 역사적 연결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두 상징이 동일한 감정의 구조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Bernhard Plockhorst, 〈선한목자, The Good Shepherd〉, 1878,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약한 생명 앞에서 외면 할 수 없다는 감정, 나의 힘을 나만을 위해 쓰지 않으려는 마음, 이것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공통된 감정의 공명(共鳴)입니다.
그 공명 앞에서
의(義)안의 양(羊)은 오늘 저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아니?”
그리고 아(我)는 답합니다.
“우리는 하나야”
이 질문의 역사는 진정 오래되었고, 지금도 사랑으로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