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감정과학 01. 사랑은 왜 타인을 ‘나’로 착각하는가
| [감정과학 철학 칼럼] 감정과학 01. 사랑은 왜 타인을 '나'로 착각하는가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가 보여 준 역지사지의 함정 |
![]() |
김효정
• 미술치료사
• 감정을 연구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기록적인 폭염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훅훅 깎이는 한여름 밤, 마침 약간의 시간 여유가 생겨 보고 싶어서 체크해 놓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예매창을 열었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가 평일 저녁 장애인석을 제외하곤 단 한 자리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서둘러 앞에서 두 번째 열의 자리를 선택했다. 2시간 동안 음악 한마디 나오지 않는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같은 장면에 숨을 들이쉬고 탄식하다 나왔을 때, 뻐근한 건 꺾인 목보다도 뒤통수였다.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공식 포스터. ©2024 動画工房ぞうしま / 제공: ㈜엣나인필름>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성인이 된 뒤 조현병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누나와, 그 증상을 인정하지 않아 누나의 치료를 거부, 집안에 가둔 한 의사 부모를 동생인 후지노 토모아키 감독이 기록한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사생활의 문제로 OTT에 공개할 예정이 없다는 것이 희소성을 높인 것이었는지 영화의 소문은 빠르게 SNS를 타고 퍼졌다. 감독이 했던 자조적 질문이 보는 이의 마음에도 전달되었던 것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남긴 공통의 한 줄 평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였다. 관객은 두 시간 동안 누나가 되어 보고, 부모가 되어 보고, 감독이자 동생이 되어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되었다고 믿는다. 상업 영화와 같은 홍보 없이도 입소문을 타고 영화의 개봉관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높은 몰입력과 대중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충분한 여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조현병은 병 자체보다도 그것을 둘러싼 낙인과 침묵 때문에 우리 일상에서 좀처럼 만나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본 적도 없는 이 낯선 병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올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속이 부글부글 끓고 한숨이 나오는 몸의 변화를 느꼈다. 다양한 마음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 탓도 있었을 것이다. 조현병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중대한 곤란을 가져올 수 있기에, 조기에 발견하여 전문적 치료를 지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속적인 약물 치료는 증상을 완화하고 일상생활과 사회적 활동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오랜 세월 적절한 치료와 지원을 받지 못한 누나의 상황에 답답함과 분노가 치밀었다. 모두가 이러한 사전 지식이나 접촉 경험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을 수밖에. 모두가 있었을 것이다.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람을 나와 같다고 생각해 본 적. 그 때문에 선한 마음에서 행한 배려가 오해를 낳고 또 쌓여, 결국 외로워져 버리고 말았던 경험. 어떤 거대한 사랑이 나를 짓눌러 숨 못 쉬게 만들었던 경험. 이 영화는 어떤 특정 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실타래가 잔뜩 꼬여 버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답답한 가족의 사랑 이야기였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언제나 나이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 근본적인 사실을 이해해야만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나도 너도 우리도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성학십도의 서명도에는 인물위기지병(認物爲己之病)이라는 구절이 있다. 외물과 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나의 것으로 오인해 생기는 마음의 병을 이야기한다. 가족은, 특히나 부모와 자식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얼마나 쉬운가? 나의 몸에서 분리된 아이를 남으로 느끼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는 할 터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이다. 같은 것을 먹고, 보고 자랐어도 우리는 각각의 감각기관을 통해 각자 다른 몸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자극을 하는 상대의 본성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을 받는 사람, 즉 나 자신의 본성이 포함됨을 설명하면서 “외부의 물체에 관하여 가지는 관념은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 우리 신체의 상태를 한층 더 많이 나타낸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내가 판단한 상대의 정보가 상대의 것이라 느껴져도, 사실 이 정보는 나의 상태를 더 반영한다는 뜻이다. 영화 속 어머니는 누나의 병을 부정하며 말한다. “마사코(극 중 누나)가 자신을 병에 걸린 사람 취급하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여 측은한 마음을 가진 것은 사실일 것이다. 또한, 딸이 자신의 눈에 저리 비춰진 것 역시 사실이겠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구분하여야 한다. 이것은 어머니 본인의 생각이지, 딸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이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지면, 비극은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과 나는 다르니 신경도 쓰지 말고 이해의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까? 이에 주자가 장구를 붙인 『대학』의 현명한 한마디, ‘혈구지도(絜矩之道)’를 빌리고자 한다. 나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는 방법이다. 나를 상대의 자리에 끼워 맞춰 그 마음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자로 삼아 나 자신의 행동을 재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부정과 강요를 타인에게도 행하지 않도록 말이다. 나를 인정받기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내가 부정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병에 걸린 나도, 병에 걸리지 않은 나도 나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감독의 질문에, 다만 인정했어야 한다고 대답하고 싶다. 딸을 독립된 존재로, 딸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병에 걸린 딸 그대로 받아들였어야 한다고. 딸의 마음을 부모가 대신 결정하도록 두지 말았어야 한다고. 보호의 이름으로 병을 부정하기보다는, 병을 가진 딸을 자신과 분리된 하나의 사람으로 인정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을 인정하면 딸의 병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치유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강 작가는 물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대답한다. 앞으로 올 날들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존재를 지우고 마는 안타까운 일이 없기를 바란다.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를 사랑으로부터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사랑이 가진 사명 중 하나는 하나 됨의 착각으로부터 나와 상대를 끝까지 지켜 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