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감정사랑방 3. 나는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감정과학 코칭 칼럼] 나는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감정해석에서 감정과학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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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미
생각 없이 산다는 착각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라 여겼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들이 하자는 대로 사는 삶, 그래서 나의 생각은 저 멀리 밀어두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흘러가는 삶. 무가치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하는 일마다 변변치 않고, 공부도 시원찮은, 도대체 자랑거리 하나 없는 그런 내가 나는 싫었다. 가끔은 벌떡 일어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다고, 멍청하다고. 남들이 부러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있었다.
내가 받아들이는 관념대로 세상이 맞다고 생각했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기분이 나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는 것을 편안해 했고, 의견이 다르면 이상한 사람이라 여기며 멀리했다. 늘 공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감정을 배우지 않고 감정을 '결과'와 '동의 여부'로만 판단해 온 사람의 필연적인 허기였다.
문화교차학과에 들어와 감정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몸과 마음으로 생겨나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사유(思惟)를 하면 공덕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 감정이 이 말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덕을 좋아하는구나. 단 하루도 생각 없이 사는 삶은 없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생각하는 나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사유를 하면 공덕이 쌓인다는 말의 의미를, 나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유하면서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고민도 그 사람 스스로의 사유 안에서 찾아가도록 돕게 되었다. 그렇게 지인들을 돕다 보니, 그들이 참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공덕이었다. 내가 나를 제대로 찾고 나니 다른 사람이 보였고, 그러자 사람들이 다 좋아졌다.
이 경험은 감정과학이 말하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의 원리를 몸으로 증명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본성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마음은 당연히 감정의 필연성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 내가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 조건이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의 필연성으로 — 받아들이자, 그 이해는 저절로 타인에게로 확장되었다. 남을 도우려고 애써 마음을 낸 것이 아니라, 나를 바르게 이해하는 눈이 자연스레 타인을 바르게 보는 눈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존재의 필연성을 명석판명하게 이해하는 마음은 그 이해를 통해 세상 모든 존재를 같은 필연성 안에서 바라보게 된다. 감정과학은 결국 '이해하는 사랑'이다.
돌아보면 나를 오해하게 만든 것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해석해 온 나의 인식이었다. 성적이 나쁘고 외모가 평범하고 자랑할 것이 없다는 '조건'은 나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나 자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조건들로 나를 재단하며 스스로를 부정해 왔다. 그 부정이 공허함으로, 남들과의 갈등으로, 벌떡 일어나 나를 책망하는 밤들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감정과학은 감정을 좋고 나쁨으로 가르지 말라고, 대신 그 감정이 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고 배우라고 말한다. 화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화 덕분에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문장은, 내가 사유를 통해 나 자신과, 그리고 지인들과 화해해 온 과정을 정확히 설명해 준다. 나는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유하는 마음으로 나의 감정 하나하나에 고유한 필연성이 있음을 배워가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해는 성동권 교수의 말씀처럼 "감정 느끼며 배워서 감정대로 사는" 일상의 실천이 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동권 교수의 책에서 '나의 벗'이라는 표현이 내 가슴에 온전히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를 오해에서 이해로 데려다준 그 배움의 자리에,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서 있다.